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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사 이야기
안동태사묘(安東太師廟)
태사묘(太師廟)는 안동시 북문동 24-1번지 1229평(坪) 대지에 삼태사(三太師) : 김선평(김선평:성주), 권행(權幸:本新羅宗姓金), 장정필(張貞弼:初名 吉 ) 공(公)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천여년이 넘도록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해온 태사묘우(太師廟宇)를 비롯하여 보물각(寶物閣)과 숭보당(崇報堂), 동·서재(東·西齋), 경모루(景慕樓), 전사청(典祀廳), 차전각(車戰閣),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등 10동(棟)의 건물이 기념물(記念物) 제15호로 지정되고, 고려때 유물(遺物) 11종 21점은 보물(寶物) 제451호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서 안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적(遺蹟)이다.[보물각 태사묘 삼공신유물(寶物閣 太師廟 三功臣遺物)]
삼태사(三太師)와 병산대첩(甁山大捷)
신라말 귀족의 왕위 쟁탈로 왕권(王權)이 약화되자 9세기에 이르러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은 신라의 영토를 쟁취(爭取)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견훤(甄萱)은 신라의 여러성을 쟁취(爭取)하고 929년 고창군(古昌郡)을 침략하려고 석산(와룡면서지.절골 앞산)에 진을 치고 927년 동수(桐數:팔동산)싸움에서 크게 패한 고려 왕건(王建)은 군사를 정비하여 병산(甁山: 와룡면 서지. 절골 뒷산)에 대치하니 그 거리가 500보 정도였다.
이때는 삼태사(三太師)의 향배(向背)에 따라 승패(勝敗)가 좌우되는 시점인데 태사공(太師公)들은 왕건(王建)을 돕기로 협의하고 930년 고려를 도와 협공(挾攻)하자 견훤군(甄萱軍)은 군사8000여명을 잃은 후 패하고 도주하였다.
이때 안중(安中)할머니가 몰래 고삼술을 빚어 견훤(甄萱)의 군사들에게 권하여 만취(滿醉)케 하고 삼공신군(三功臣軍)에 알려 급습(急襲)으로 승리(勝利)할 수 있게 하였다는 설(說)이 전(傳)하고 있다.
병산대첩(甁山大捷)에서 대승하자 인근 30여 고을은 물론 신라 동북쪽 여러 성주(城主)가 고려에 귀부(歸附)하였으며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935년에 고려에 투항(投降)하고 후백제는 부자간(父子間 왕권(王權) 싸움으로 936년에 고려에 멸망하니 후삼국은 통일(統一)되었다.
삼태사(三太師)와 안동(安東)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삼공신(三功臣)에게 병산대첩(甁山大捷)의 공(功)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직위를 제수(除授)하고 이어 태사(太師)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고창군(古昌郡)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동국(東國)을 안전케 했다는 뜻으로 지명(地名)을 안동(安東)으로 고친 후 삼태사(三太師)의 식읍(食邑)으로 내리니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한 삼성(三姓), 김(金)·권(權)·장(張)씨가 생기고 삼태사공(三太師公)들은 각성(各姓)의 시조(始祖)가 되니 안동(安東)은 유서(由緖)깊은 도시로 오늘날 안동문화권(安東文化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와 배향(配享)
고려시대는 삼태사(三太師)의 위패를 부(府)의 삼공신묘(三功臣廟)에 모시다가 조선중종(中宗)때부터 이곳 태사묘우(太師廟宇)에 모셔왔다.
[삼태사묘(三太師廟)의 위패(位牌) :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우신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등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때에 삼성(三姓)의 대표 권함(權諴) 김태(金兌) 장흥효(張興孝)가 합의(合議)하여 위패(位牌)를 세분이 같게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으로 고쳐 성(姓)고 휘(諱)만 다르게 개제주(改題主)하여 권오(權晤)가 써서 나란히 모시고 있다.
조선선조(宣祖) 임진왜란(1592~1598)때 묘직인 안금이(安金伊)가 삼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를 길안면 국란(菊蘭) 계곡 동굴로 모셔 가서 봉향(奉享)하다가 평란(平亂)후 환안(還安)하였다.
이에 안묘당(安廟堂)을 지어 안중(安中)할머니는 달리는 백마(白馬)를 그려 전승(戰勝)을 상징(象徵)하고 안금이(安金伊)는 위패(位牌)로 모시고 삼태사(三太師) 향사시(享祀時)에 마련된 음식으로 잔(盞)을 올려 그들의 공(功)을 기리고 있다.
6.25동란(1950~1953)때는 유사(有司) 장봉섭(張鳳燮)이 생명을 걸고 폭격속에 들어가 삼태사(三太師)의 위패(位牌)를 모셔와 성곡동 장(張)씨의 광풍정(光風亭)에 안치하였다가 다음해 능동권(權)씨의 보판각(譜板閣)으로 옮겨 모시다가 동란 후 1958년에 태사묘(太師廟)가 완공(完工)되고 환안(還安)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향사(享祀)는 고려성종(成宗)(983년)때부터 삼공신(三功臣)의 공덕(功德: 전쟁의 禍免·郡을 府로 승격)을 추모하여 부(府)에서 부리(府吏)의 주관 하에 부사(府使)와 부민(府民)들이 함께 제향(祭享)하다가 점차 후손들이 맡게 된 것으로 보며 조선시대부터는 유교적 의례(儀禮)로 체계(體系)를 잡게 되자 명종 때부터 4절사(節祀)(정조.단오.추석.동지)에 제향(祭享)하다가 선조(宣祖)(1585)때부터 삼성(三姓)이 의론(議論)하여 춘추중월(春秋仲月)인 음력 2·8월의 중정(中丁)일에 향사(享祀)를 모시며 헌관(獻官)은 삼성(三姓:金.權.張)에서 윤번(輪番)으로 선임하여 봉제(奉祭)하고 있다
태사묘(太師廟)의 건립(建立)과 관리(管理)
고려성종(成宗)(983년)때 부민(府民)들이 정성을 모아 부(府)내에 사당(祠堂:三功臣廟宇)을 지은 것이 태사묘(太師廟)의 시작이며, 조선11대 중종(中宗)(1542)때 강릉인 김광철(金光轍)부사(府使)가 삼공신묘우(三功臣廟宇)를 현 위치로 옮기고 15대 광해군(光海君) (1613년)때 권반(權盼), 권태일(權泰一)이 삼성(三姓)의 후손들과 함께 성금(誠金)을 모아(이때 14개군 참여) 현재규모(現在規模) 중건(重建)하고 태사묘(太師廟)로 개칭하였다.
임진외란때와 20대 경종(景宗)(1721년)때의 큰 화재(火災) 그리고 6.25동란 때 등 태사묘(太師廟)는 세 번이나 전소(全燒) 하였으나 위패(位牌)는 그 화(禍)를 면하였고, 그때마다 후손들이 성금(誠金)을 모으고 부(府)와 국가(國家)의 보조로 재건립(再建立)하였고 현재의 건물(建物)은 6.25동란 후 1958년에 준공(竣工)하였으며 보물각(寶物閣)과 경모루(景慕樓)는 1963년에 증축(增築)하였다.
태사묘(太師廟)관리(管理)는 처음에 부리(府吏)가 맡아 한 것으로 보며 다음은 후손(後孫)들이 맡았으며 현재는 삼성(三姓)에서 관리위원 각7명씩을 선임하여 총21명이 향사(享祀)를 비롯한 재정(財政). 건물(建物). 토지(土地)등을 총괄 관리한다.
삼태사묘와 삼태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