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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선조들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자(字)는 정집(正集)이요. 어릴 때 이름은 궁복(弓福)인데 또 다른 이름은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관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강의군사(感義軍 使) 진해장군(鎭海장군)이시고 장군의 아버지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 부(蘇興府) 용흥(龍興) 사람이신데 당나라에서 중랑장우복야(中郎將右僕射)를 지냈으나 750년 경(경덕왕) 신라로 귀화하였고 장보고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장군과 정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장보고와 정년 이란 사람이 있으니 모두 신라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싸움을 잘하고 특히 창을 잘 썼다. 정년은 바다 물속에 잠겨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고 용맹하고 굳건한 것은 保皐를 따르지 못했고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는데 보고는 나이로써 정년은 재능으로써 항상 의견이 어긋나서 서로 굽히지 않았다...이하 생략] (신당서 권 220) 

이 내용이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에 가필되어 전해오고 있다. 


젊은 시절 정년과 함께 당나라에 가 무령군 소장으로 활약하던 장군은 물러난 후 무역상을 하면서 신라의 래도인 (來渡人), 백제의 유목민까지 통합을 이루고 산동성, 문등현, 청령향, 적산촌, 유산포, 등주, 로산 등 10여 곳에 신라인들만의 집단촌(신라방)을 세우고 적산촌 서북쪽 5km에 법화원(法華院)이란 큰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절의 규모가 한때 승려가 27-40명이나 상주했고 절에 딸린 논이 500석에 이름) 


사업을 확장하면서 신라의 백성들이 신라 연안에서 해적에 의해 잡혀 와 노예로 팔리는 등 비참한 형편인 것을 알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서해의 해적들을 소탕할 길을 늘 생각 하다가 323년 4월 신라 흥덕왕을 배알하고 군'사 만명을 얻어 청해진 대사가 되고 정해(現 완도)에 군진(軍鎭)을 세웠다. (삼국사기 홍덕왕 편) 


김성훈(金成勳)교수는 “장보고 해양 경영사 연구의 의의”란 논문에서 청해진과 장군을 일러 군산복합 종합상사(軍産複合 綜合商社)의 수장(首長)이라 했다. 장군은 청해진을 세워 서해의 해적을 섬멸하고 신라인들이 평안히 어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 신라와 일본으로 또한 신라와 당나라로 무역을 함으로 해상무역의 길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기에는 장군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 없어 유감스럽다. 그나마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간추려 아래에 옮겨 쓴 다. 

837년 5월 김명(金明)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웠던 우징(후에 신무왕)이 황산진구로 달아나 청해진대사 궁복에게 의지하였다.(삼국사기 희강왕 편) 

838년 1월 상대등 김명이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물리치고 왕이 되다 (삼국사기 민애왕 편) 

838년 우징의 요청으로 대사는 정년에게 군사 오천을 나누어 주고 또 12월에는 김양(金陽)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염장(閻長), 장변(張弁), 락금(駱金), 장건영(張健榮), 이순행(李順 行)과 함께 싸우게 하고 839년 윤 정월에 민애왕을 살해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 제10 민애왕편) 

839년 신무왕이 즉위하고 대사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실이천호(食實二千戶)를 봉(封)하였다.(삼국사기 권 제10 신무왕편) 

839년 신무왕이 갑자기 죽자 태자 경응(慶膺)이 대를 이어 문성왕(文成王)이 되다. 

청해진대사 궁복을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의복을 하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1 문성왕편) 

845년 문성왕이 청해진 대사의 딸을 차비(妃)로 취(娶)하려 했으나 정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846년 한때 청해진 대사의 수하였던 무주인 염장(閻長)이 출세의 길을 얻고자 황도에 남아있더니 청해진 대사의 보복이 있을까 두렵게 생각하고 있던 정신들에게 나아가 대사 암살을 약속하고 청해진에 이르러 대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위한 주연석에서 대사를 암살하고 달아났다.(삼국사기 권 제11 문성왕편) 


이상의 기록을 통해 나약한 정신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해진과 대사를 경계했으며 나라의 번영과 장래를 위해선 얼마나 근시적이었나 드러나 있다. 청해진 대사의 해양 경영사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기에서는 모조리 삭제되고 없으니 애석하다. 오히려 외국사람들이 보고 기록한 기록으로 신당서(新唐書), 일본후기(日本後記),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그리고 일본의 승려 자혜대사(慈覺大師) 원인(圓仁,옌닌)이 10년 동안 지내며 쓴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 귀중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851년 장군이 암살당하고 6년째 되어서 청해진을 파하고 남은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김제)으로 옮기었다 라고 사기에 기록이 있다. 이것은 상당기간 청해진의 세력들이 청해진을 지키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대사의 가족과 막료들이 청해진을 포기하고 당으로 돌아가는 데 걸린 시간이 길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태사 충헌공 장정필(張貞弼)

안동장씨의 시조 (安東張氏의 始祖)

시조의 초휘는 길(吉)이요,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하여 정필(貞弼)이라 개명하셨다. 관직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統合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시조께서는 888년 당나라에서 태어나 892년 부친 원(源)께서 당말의 병란을 피해 가족을 데리고 신라로 오실 때 다섯 살이었다. 처음 상륙한 곳은 명주 현강능(경포호반)으로, 후백제 견훤의 세력 확장으로 남쪽 지역이 불안하자 동해안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내륙으로 들어와 충주(중원소경) 부근에 정착하셨으며, 부친의 묘가 원주에 있다.


공은 18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쓰셨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부상서가 되었으나, 간신의 무고로 신라로 돌아오셨다.


이후 고창으로 내려가 김선평, 김행 공과 교류하였고, 930년 1월 병산대첩에서 고려군을 승리로 이끌어 후백제 몰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왕건은 김선평에게 대광, 장길과 김행(권행)에게 대상 벼슬을 내리고, 안동을 식읍으로 주었다.


시조께서는 이후 고려 왕실을 도우시다 91세로 향수(享壽)하셨다.

화령백(花寧伯) 장려(張價)


자는 시유 (始有)요 휘(諱)는 려(價)인데 기록에 따라 열(烈) 또는 여(侶)라고 쓰기도 하였다.


공은 시조 충헌공의 13대 손인데 대대로 벼슬을 많이 한 명문가(名門家)에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 좌정승(門下評理 佐政丞) 문효공(文孝公) 휘가 양우(良佑)이고 아버지는 정헌대부(正憲大夫)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문화부사(文化府使)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휘 수명(壽命)公이요. 그분의 셋째 아들로 1295년 3월 19일에 태어났다.


공은 충숙왕(忠肅王) 10년 문과에 올라 예의판서(禮儀判書) 문하우정승 (門下右政丞)을 지낼 때 임금에게 충성스런 간언(諫言)을 했다가 왕의 뜻을 거슬린다 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우왕 14년 (1388) 요동을 공략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성계(태조)가 우군도통사(右軍都使)로 압록강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큰 아들 사길(思吉)과 넷째 아들 사정(思靖) 그리고 사길의 아들 철을 위화도에 나아가 회군(回軍)을 하도록 하였다.


공의 부인은 경창택주(慶昌宅主) 곡산강씨(谷山康氏) 상산부원군(象山府院 君) 강윤성(康允成)의 따님으로 태조 이성계의 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비와 자매 간이니 태조와는 사적으로 동서간이 된다.


공은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떠나고 의주에 남아 살다가 돌아가시니 묘는 의주 비현면 노동 양철령에 있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

화산부원군은 어떤 분인가?


태사 충헌공의 후예들은 고려 조종에 기라성 같이 자리 잡았다. 화산부원군 희양공은 시조의 15세이며, 증조부가 문효공 좌정승 양우(良祐)이며, 조부가 좌리공신 정헌대부 문화부사사 전공조판서 수명(壽命)이고, 아버지는 예의판서 문하우정승 화령백 여(儷)이며, 어머니가 경창택주 곡산강씨로 상산부원군 강윤성(康允成)의 따님이며, 신덕왕후 강비와 형제간이다. 


공은 1341년 충혜왕 때에 출생하였으며, 휘는 사길(思吉). 자는 창만(昌萬), 호는 복재(復齋)이니 목은 이색이 지은 것 이다. 공민왕 (1361)때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그 무렵 화령백이 충성스런 간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린다 하여 의주목사로 좌천되자 화산부원군도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의주로 내려 갔다. 거기에서 학당을 세워 사람들을 교육했다. 그 때에 우왕이 무도 한 짓을 자행하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공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뜻이 있어 많은 인물들과 사귀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오천명을 길렀다. 밤에는 손자(孫子) 와 오자(吳子)의 병서를 읽고 낮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며 때를 기다렸다. 우왕 14년 (1388)에 요동을 공략하라는 왕명이 내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대군이 북상해 왔다. 압록강 가운데 위화도에서 대군을 주둔시키고 주저하며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고 요동을 칠 의사도 없었다. 때를 기다리던 화산부원군은 오천명을 이끌고 위화도로 가서 이성계를 만났다. 이성계 장군은 바로 화산부원군의 이모부인 것이다. 거기에서 요동을 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과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회군하는 것이 옳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위화도 회군의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마침 장마철 이어서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수많은 군사들을 강변으로 배로 실어 나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계속해 쏟아지는 비로 압록강 물은 자꾸 불어 갔으며, 마지막 군사가 강변에 상륙을 마치자 위화도는 홍수에 가라앉고 말자, 사람들이 모두 기이 한 일이라고 했다. 공은 동생 사정(思靖)과 아들 철(哲)과 같이 이성계 장군을 따라 개성에 이르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때에 이르러 우왕은 사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왕위를 아들인 창(昌)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여겼었다. 왕씨의 계통이 끊어진 지도 16년째가 되었다. 해서 왕씨 종친 가운데서 정창부원군 요를 왕으로 맞아들이니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인 것이다.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이들을 회군공신을 삼으니, 화산부원군과 그 아우 사정(思靖) 그리고 아들 철(哲) 삼숙질이 함께 회군공신에 올랐다. 


조선의 개국과 개국공신 


그때 서해도에 왜구들이 침입해 오자 화산부원군은 공양왕의 명으로 이지란과 더불어 나가서 치니, 쳐서 죽인 왜구와 사로잡은 것이 더욱 많아서 왜적들이 휩쓸려 감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뒤 공이 병환으로 사임하자 태조가 공양왕의 명으로 공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대신 통솔했다. 


그 무렵의 상황은 나라는 위태하고 임금은 나약해 백성들의 마음은 편치 못해, 모두들 이 태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 움직임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맹문(會盟文)을 지어 결속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말의 역사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공양왕 4년(1392) 임신(壬申)에 태조에게 양위하니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그 해 7월의 일이다. 태조는 바로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했고, 8월에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봉해 간성군에 두었다. 그리고 그 달에 개국하는데 공이 있는 사람들을 개국공신에 봉했다. 


최초에 봉해진 개국공신은 1등에 17명, 2등에 13명, 3등에 22명이었다. 그러나 그 뒤의 두 차례 걸친 왕자의 난이나 또다른 일로 인해, 공신 칭호가 삭제된 이들이 있어 1등이 15명, 2등이 9명, 3등이 13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를테면 1등공신 정도전과 남은이 1차 왕자의 난 때 방석을 끼고 돌 다 죽어서 삭제된 것이다. 


태조가 즉위한 것은 임신(壬申)이지만 제1妃인 신의왕후 韓씨는 등극 전에 별세했다. 즉위할 때에는 제2비인 신덕왕후 강(康)씨만 남았다. 태조가 즉위하자 바로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는 제쳐두고 강씨 소생 두 명의 왕자 중 끝인 여덟 번째 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조선조 개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많은 공로를 세운, 韓씨 소생의 여섯 왕자들이 울분이 쌓여서 왕가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돈다. 태조 5년 8월에 신덕왕후 강씨가 승하한다. 태조 3년 정도전이 정승에 올라 영의정에까지 이르러 세자 방석을 끼고 조정의 세력을 규합해 갔다. 


태조 7년(戊寅 1398) 8월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태조의 병환이 위독해 한비(韓妃)가 낳은 왕자들을 태조 문병으로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자. 이들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판단해 선수를 쳐서 정도전과 남은을 먼저 살해한다. 뒤이어 강비(康妃) 소생의 방번과 세자 방석도 살해되었다. 


하륜(河崙)이 충청도 감사로 서울을 떠나게 되자, 화산부원군은 안성군수 이숙번(李叔蕃) 등과 힘을 합해 행동했다. 결과적으로는 정안군 방원(芳遠)을 지지하는 세력이 판도를 뒤집은 것이다. 모두 정안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정안군이 고사하는 바람에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芳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태조는 그에게 왕위를 전위하게 되어 정종(定宗)이 즉위했다. 


화산부원군의 활약 


이 때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녹훈한 것이 진충협찬정란 정사공신이다. 1등이 12명, 2등이 17명이었으나 뒤에 삭훈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1 등이 8명, 2등 10명으로 줄어들었다. 화산부원군과 화산군 사정(思靖), 화성군 철(哲) 3숙질은 2등에 녹훈되었다. 화성군에게 내린 녹권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기에. 안동장씨 대동보에는 그것을 원색으로 기재하고 있다. 공민왕 때 문과로 등단해 고려조에서는 밀직부사로 재직해 있었지만 화령백이 의주목사로 좌천될 때에 함께 물러나서 의주에 사숙을 차리고 백성들에게 예의와 도리를 깨우쳐 주는 한편, 무너져 가는 고려를 반정해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병법과 무예 아울러 닦아서 문무가 겸전하게 되었다. 


태조를 따라 위화도 회군에 동참해 자연히 그의 심복이 되어, 조선조 개국과 왕자의 난 때에 크게 활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양왕이 태조에게 선위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많았으나 만조 백관들의 간청과 협조가 있어서 비교적 순조롭게 선위가 이루어졌으며, 화산부원군의 활동도 눈부시었다. 


개국해서 3대 임금인 태종은 바로 정안공 이방원(李芳遠)이다. 이 때에 조선왕조의 기틀이 단단히 닦여졌다. 그 뒤를 이은 성군 세조의 눈부신 활약으로 조선 문화의 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 태종 18년 8월에 세자에게 선위하니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 1년 기해(1419) 10월 29일에 공이 하세(下世)했다. 그 때의 상황을 왕조실록의 기록으로 알아본다. 세종 1년 10월 30일. 화산부원군 장사길이 졸하니, 사흘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궁 중에서 사흘동안 소찬을 진어하였다. 시호(諡號)를 희양(僖襄)이라 하니, 시법(諡法)에 “삼가 조심하여 두려워 거리낌 없을 희(僖)”라하고, “전쟁에 공로가 있음을 양(襄)” 이라 한다. 사길은 용모와 행동이 아름답고 수염이 길어 그 배를 지나며, 무예가 있어 태조가 뽑아서 심복이 되었다. 


상왕(上王)이 말하기를 "장사길을 어떤 등급의 예로써 장사 지내겠는가” 하니 조말생(趙末生)이 대답하기를 "공신으로서 부원군에 책봉되었으니, 1등의 예로써 장사 지낼 것입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대신이 죽으면 은외의 두텁고 박한 것으로 혹은 부의(賻儀)를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했다. 사길의 형제가 정성을 다해 나라를 받들었으니 예가 마땅히 1등으로써 장사 지내는 것이다. 공의(公義)이지 궁인(宮人)의 친족 때문임은 아니다. 옥상(玉上)이 반드시 부의를 내리고자 하더라도 마땅히 이를 중지하게 하라. 내가 듣건대 그 집이 심히 가난하다고 하니. 내가 직접 본궁(本宮)의 쌀 열섬을 내려주고자 한다"고 하셨다. 세종 2년의 기록에는 "장사길에게 제(祭)를 내려 주다'라는 것이 있는데, 직접 사제(賜祭)했던 것이다. 

공에게는 세 아들이 있으니 맏이는 주(住)이니 대호군이고, 둘째는 서(瑞)이니 군수이다. 셋째가 철(哲)로 정사 2등공신, 화성군, 희양공(莊襄公)이다. 주(住) 선조의 생졸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서(瑞), 철(哲) 선조는 모두 화산부원군 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화산부원군의 향수는 79세다. 


교하 맥금리 상곡동 현 위치에 장사 지냈다. 한 때 실전되었으나 6대손인 중인(仲仁) 선조가 파주 목사 재임 시에 다시 찾아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감에 따라 묘비도 풍화가 심해지자, 멀리 함경도 영흥의 후손들이 돈을 모아 다시 고쳐 세우니 지금도 남아 있다. 


평안도 청천강 이북의 사림(士林)들이 공의 덕을 기려서 의주의 사당을 세워서 향화(香火)를 드리니 그것이 용현사(龍峴祠)다. 


순조대왕이 조선조가 개국한 임신년이 여덟 번째로 돌아 온, 순조 12년 壬申(1812)에 고양군수 이현비(李玄妃)를 보내 인사(禋祀)를 지내면서 사제문(賜祭文)이 있었다. 이곳이 현재의 6만 후손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다.

장양공(莊襄公) 장철(張哲)


장양공의 행적


공의 휘는 哲(철)이요. 자는 自明(자명)이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희양공(僖襄公)의 셋째 아들이시다. 그리고 의주목사 화령백 여(麗)의 손자이시다.


公은 고려 공민왕 8년 5월 4일 (1395년 己亥)에 태어나시니 총명하고 특달했다 하며 풍채 또한 先考를 닮아 아름답고 성품은 진숙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참판(參判) 박질이 한번 보고 마음에 들어 딸을 시집 보냈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公이 성장할 때 나라는 신우(辛禑)의 정사가 문란했다.

어떻게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하더니 마침 무진년에 최영이 신우와 의논해서 요양을 정벌하려고 太祖(이성계)를 원수로 삼아 진군케 함으로 태조가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위화도=압록강에 있는 섬)


公이 소를 잡고 술을 받아 수레에 싣고 군진(軍陳) 元帥(이성계)에게 나아가 알현하니 태조가 공과 이야기를 해보고 마음에 들어 그날부터 항상 군영 숙소에 머물게 하였다.

하루는 원수(元帥)가 막료들을 모아놓고 큰소리로 내가 요양을 침범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닌데 진군하지 않으면 우리 집에 큰 화가 미칠 것이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을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公이 일어나 말하였다.

"거짓임금 신우는 하늘의 뜻을 거슬려 보위를 훔치고 부도(不道)한 일을 멋대로 자행함으로 머지 않아 나라를 회복할 수 없는 수렁으로 몰고 갈 것이 뻔한데, 원수(元帥)께서는 정의(情意)에 매여 군사를 돌이켜 거짓을 폐하고 바로잡아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했다. 이 말을 들은 侍中 (시중) 조민수(曺敏)가 그 말이 옳다 강력히 회군을 권고하니 太祖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신우를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 왕사(王社)가 안정되니 公은 회군공신(回軍功臣) 特賞으로 천호(千戶)를 받으시었다. 1392년(壬申) 太祖가 왕위를 넘겨받고 다음해 癸酉年에 과거에 올라 행돈령승선(行敦寧承善)을 지내시다가 1398년 소위 왕자의 난에 公이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淑蕃)과 정안공(靖安公; 나중에 太宗)을 받들어 궁중의 종들과 정능군(貞陵軍)으로 무장시키고 간신들을 먼저 베이니 역도들이 모두 잡혀 죽었다.


공은 정종조 정사이등공신(定宗朝 定社二等功臣)이 되시고 가정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올라가시고, 이때 화각(畵閣)에 公의 초상화를 그려 걸게 하고 비(碑)를 세워 공로를 기록하게 하였다.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고 함경도 함흥에 은거하시니 公은 정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함흥에 가서 회어(回御)하기를 간하였으나 太朝께서는 公을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옆에 머물게 하니 공께서는 忠誠을 다해 모시었다.


그후 태종이 즉위하고 수차 사신을 보내어 회어하기를 간절히 빌었더니 차츰 마음이 열리고 이를 틈타 公께서 강력히 요청을 하였더니 승낙하시고 풍양(豊壤)의 신궁(新宮)로 돌아오신다. 이때 公께서 정성을 다하여 대가(大駕)를 호종(扈從) 하였다.

공은 화성군(花城君)에 封해지고, 太祖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 후 공께서는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자원(自願)하여 내려가시고, 1408년(戊子)에 太祖가 승하(昇遐)하시니 상왕(上王)의 은총을 생각해서 슬피 울었더니 호종할 때 얻은 병이 점점 악화되고, 그로 인해 1415년 乙未 五月+日돌아가시니 시호는 장양(莊襄)이요 묘는 영흥부(永 興府) 덕흥사(德興社) 광성동(廣城洞) 남쪽 기슭 계좌 언덕에 있다.


※ 卒年은 王朝實錄의 記와 差異(차이)가 있다. 실록의 定宗 2년은 잘못인 것 같다. 왜냐하면 졸기에 "太上王(太祖)을 新都(신도)에 扈從 (호종) 하다가 등창이 났는데 몸을 삼가지 안했다" 란 記錄으로 보아 증명된다. 太祖가 함흥에서 신궁(新都)으로 돌아오신 것이 太宗이 즉위한 後이기 때문이다.

故로 卒日은 우리 族譜에 따르기로 한다.